평소에는 어려운 책들을 읽다가도 정작 마음이 편치않거나 심리적으로 힘들 때는 에세이를 읽게 된다. 아마도 에세이가 현실적으로 나의 삶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 하다. 에세이는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그 만큼 작가들의 삶이 현실적으로 드러나고 그 안에서 난 가장 실용적인 배움을 경험한다.
김보통이라는 사람은 대기업을 관두고 집에서 브라우니를 만들면서 그림을 그리다가 스스로 ‘불행하지 않음’을 깨달았고 정희재 작가는 자신의 평범한 삶 속에서 ‘행복의 조건’을 깨달았다. 이들의 ‘평범함 삶’과 ‘거창하지 않은 깨달음’들이 매력적인 이유는 현실속에서의 우리들의 행복과 너무 밀접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행복’이란 그냥 평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행복이 평범한 일상에 있다는 생각 조차를 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혹은 행복이란 원래 미래에 있는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결정해버린 지도 모르겠다.
내가 에세이에서 실용적인 배움(?)을 경험할 수 있는 이유는 작가들이 자신들의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그 과정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이야기의 결론이 아닌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른 책들과 달리 에세이는 결론만 볼 경우 따분하고 지루한 이야기로 전락해버린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하루도 과정없이 결과만 보면 어제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안에는 너무 다양한 행복이 다르게 존재한다.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저자:김보통) 에서 좋은 다섯 문장
- 돌아보면 ‘미래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고통은 참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내 모든 불행의 원천이었다. 미래에 진짜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뜬구름 같은 행복을 위해 나는 분명히 실재하는 오늘의 고통과 슬픔을 무수히 감내해야만 했다.
-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금처럼 살아가면 될 일이다. 가진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만들 수 있는 것을 만들자. 브라우니를 만들듯 살아가기로 했다. 언제까지 태평하게 브라우니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걱정하지 말자. 불안하고 두려울 때도 오겠지만, 이제 내겐 브라우니가 있다. 곰팡이가 핀 식빵을 뜯던 나는, 브라우니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쫀득하고 달콤하며 진한 브라우니를 먹으면 그만큼 또 얼마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브라우니뿐만이 아니다.
- 초조해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지난 삶에서 초조함에 쫓겨 선택한 결과가 어땠는지를 이제는 알아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브라우니를 만들고 느긋하게 그림을 그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브라우니도, 그림도 나아질 거라 믿으면서.
- 비록 30여 년간 박수를 치느라 몸과 마음은 너덜거리는 상태가 되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나는 ‘다음’에 대해 생각하지 말아야 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타인의 의도와 보상 없이 스스로 생각하며 살아나가기 위한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 이번엔 거창한 목표를 세우지도, 근사한 의미를 부여하지도, 무언가를 회피할 수단으로 쓰지도 말고 일단 해보는 것이다. 할 수 없는 것은 인정하고, 하기 싫은 것은 피하면서 브라우니를 굽듯 천천히, 즐거운 마음으로 하자.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저자: 정희재)에서 좋은 다섯 문장
- 인생이란 어느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다림이며, 가장 나다운 나와 만나는 먼 여정임을 이해했다.
-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아야 ‘쓸모’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꼭 필요한 존재라는 확신이 있어야 ‘잘 쓰이는’ 삶을 살 수 있다. 그 확신은 자신을 믿고, 재능이 꽃필 시간을 기꺼이 기다려 주는 일부터 시작된다.
- ‘지불책우智不責愚’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나무라지 않는다.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니 어리석은 사람이니 굳이 나누지 않는다는 것을. 그저 괴로운 사람, 괴롭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임을.
- 하지만 내게 부족한 것을 알고, 내 그릇의 크기를 아는 것도 능력이고, 재능이 아닐까. 사람들이 쉽게 행복이라고 정의하는 것들의 허구를 간파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대단한 능력자가 어디 있을까.
-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심장에서 울리는 소리를 따라 길을 떠난다. 그러나 진정 성숙한 여행자는 돌아와서 자기 발밑의 장미 한 송이를 더욱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보다 멋진 사람은 굳이 떠나지 않고도 일상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내면의 여행자이다. 혹여 장미가 아니라 패랭이꽃이나 작은 들풀인들 어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발밑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나의 봄밤은 소쩍새가 있어 아름답고, 소쩍새 소리는 이 평범한 진리를 잊지 않도록 밤마다 울어 주는 훌륭한 길벗이어서 정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