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죄는 세 가지였다.
지나치게 영민한 것, 품어서는 안 될 그리움을 품은 것, 조선 마지막 황제의 딸로 태어난 것……
이 책은 고종의 막내 딸이었지만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비참하게 살다가 조선 최후의 황족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가 되어버린 덕혜옹주의 일생을 소설로 그려내고 있다. 책의 저자(권비영)는 고종황제의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황녀로서의 고귀한 삶을 살지 못했던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삶이 너무 아파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에게 집필은 사명감이자 자존심이었다.
덕혜옹주에 관한 이야기는 2007년 8월 11일, KBS ‘한국사 전 – 라스트 프린세스’에서도 다룬 적이 있다. 당시 그 영상을 관심있게 봤었기 때문에 덕혜옹주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덕혜옹주’라는 책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슬프고 비통한 기분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참고로 공주는 왕과 정비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말하고 옹주는 왕과 차비 혹은 궁녀에게서 난 딸을 말한다. 따라서 덕혜옹주는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아니라 고종과 궁녀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안에 유치원을 세울정도로 덕혜옹주를 무척 아꼈다고 한다. 그래서 영친왕처럼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는 것을 막기위해 무척 애를 썼지만 결국 덕혜옹주는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으로 가게된다. 물론 강제적인 유학이었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종이 다른 짓을 못하도록 일본에서 인질로 두기 위한 유학이었다. 일본에서 덕혜의 생황은 참담했다. 학교에서의 집단 따돌림, 고종의 독살, 어머지의 죽음, 일본인과의 강제결혼, 정실병원 강제 입원, 이혼, 딸의 자살……덕혜는 그리워하던 조국을 37년 만에 정신병자가 되어서 돌아왔다……과연 무엇때문에 그녀는 37년 후에 정신이상자가 되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채 조국으로 오게 된 것일까? 우리는 그녀의 삶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1. 기모노를 입고 떠난 유학
14살의 어린 나이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의 황족이 늘어나는 것을 싫어했으며 국민들의 관심으로부터 덕혜를 멀리 떨어뜨려 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어린 나이의 덕혜는 어머니를 떠나있어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덕혜는 영친왕의 자택에서 생활을 했는데 영친왕의 아내(일본인)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조선에 있을 때의 밝고 활기찬 모습과 정 반대로 덕혜가 항상 아무말도 없이 혼자 있었기 때문에 놀랐다고 한다. 14살의 덕혜에게 있어 침묵만이 일본에 대한 유일한 반항이었다.
2. 조선인이기 때문에 무시당한 학교생활
일본에서 덕혜가 다닌 학교는 일본 귀족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그러나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황족하고는 비교가 될 수 없는 법, 그 당시 아무리 조선이 일본에게 강점당하고 있다고는 하나 귀족이 황족과 동급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본 귀족의 자녀들은 덕혜를 무시하고 짓밟았다. 심지어 그 당시 덕혜와 같은 학교를 다닌 일본인은 ‘나 같으면 독립활동을 할텐데 넌 왜 여기에서 가만히 있니?’ 라는 철 없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고 한 방송의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3. 고종황제와 어머니 양귀인의 사망
고종황제가 독살당한 것을 덕혜는 잘 알고 있었기에 항상 보온병을 들고다니면서 물은 그 보온병에 들은 것만 마셨다고 한다.(덕혜 동창, 일본인의 기록 중)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죽음이 덕혜를 항상 두렵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 양귀인도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덕혜는 조선왕실의 전통을 따라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했지만 조선총독부는 덕혜가 상복을 입지 못하도록 했다. 고종과 어머니가 죽었을 때를 대비해서 일본은 덕혜를 겨냥햔 법을(덕혜가 상복을 입지 목하도록 하기 위한 법) 만들었었는데 그 법을 들이밀며 조선왕실의 전통을 따르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장례 2일 후 슬픔을 추스리지도 못한 덕혜를 조선총독부는 일본으로 급하게 돌려보냈다. 궁내의 초상이 독립운동으로 번질것을 우려해서이다. 일본으로 돌아온 덕혜는 먹지도 못하고, 학교도 가지 못했으며, 심한 몽유병을 보였다고 한다. 의사 진단에 의하면 덕혜는 정신분열증 이었다. 참고로 정신분열증은 사춘기에 주로 발생하는데 청소년기의 가족관계가 주요 발명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최근 학계의 의견이다.
4. 일본인과의 강제적 결혼
일본은 조선황실과 일본귀족과의 결혼을 통해 조선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기 때문에 일본인과의 결혼을 강제적으로 진행시켰다. 당시 국민들은 덕혜가 일본식으로 일본인과 결혼을 하는 것에 비통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원래 덕혜는 한국인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을 우려한 고종이 일본 몰래 덕혜를 자신을 모시던 신하의 아들(김장한)과 결혼을 시키려고 하였으나 그것이 발각되는 바람에 신하는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결혼은 무산되었다. 일본인과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덕혜의 정신이상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일본인의 기록에 의하면 덕혜는 평소에 아무런 말이 없다가도 이유없이 큰 소리로 웃었으며 확실히 정신이 이상해 보였다고 한다.
5. 정신병원 입원과 덕혜만큼 고종을 닮은 딸 마사에의 자살
일본이 전쟁에서 패전하고 화족제도가 없어지면서 하루 아침에 덕혜가족은 일반인 신분이 되었다. 아무런 특혜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자신을 모시던 하인들도 없게 되었다. 덕혜의 증상은 날로 더해갔고 남편은 끝내 덕혜를 정신병원으로 보낸다. 그리고 남편은 덕혜와 이혼하고 그 해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 그곳에서 덕혜는 15년간 갇혀 지내게 된다. 그리고 남편이른 여자와 결혼한지 1년 후 덕헤의 딸 마사에는 어느날 유서 한 장 남기고 자살을 한다. 그러나 덕혜는 정신병원의 독방에서 혼자 지냈기 때문에 그 어떤 사실도 알 수가 없었다.
6. 조국의 외면
그러나 덕혜와 결혼할 뻔 했던 김장한의 형 김을한이 덕혜를 발견한다. 당시 김을한은 기자의 신분을 이용하여 정부 관계자들에게 덕혜의 현재 상황을 알리고 조국으로 데리고 오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스스로 황제이고자 했던 이승만에게는 조선의 실제 황실이 반가울리 없었다. 조국은 냉정하게 덕혜를 외면했다. 그리고 1962년 1월 26일, 조국을 떠난지 38년이 지나서야 덕혜는 대한민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 날 김포공항엔 덕혜를 아기씨라 부르며 절을 하는 덕혜 어린 시절의 유모들이 있었다. 그러나 덕혜는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다. 조국도 기억하지 못했다.
7. 덕혜의 마지막 쉼터, 창덕궁
덕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신을 되찾지 못했다. 한국에 온 후 7년 간의 병원생활을 한 덕혜는 마지막으로 창덕궁에서 생을 마감한다. 덕혜옹주가 죽기 전 덕혜의 전 남편이 덕혜를 찾아왔었다고 한다. 그러나 덕혜를 모시던 덕혜의 측근들은 그를 매몰차게 돌려보냈다.
8. 그리고 마지막 낙서
그리고 덕혜가 생을 마감하기전 정신이 맑은 날 썼다는 낙서 한장이 공개되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