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대에 어린이/청소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누구나 이소룡을 좋아한다.(아마 그럴것이다.)
그래서 이소룡을 동경하던 어린시절 내가 이소룡의 영화를 보며 느끼던 그 감정에 대한 기억은 책에서 이소룡이 되고자 했던 주인공(삼촌)의 삶을 낯설지 않게 했다. 이 책은 이소룡에 대한 어린시절의 기억 하나만으로 쉬게 공감하고 빠져들 수 있다.
재미있는가? 얼마나? 왜?
만화책 드래곤볼만큼 재미있다.
내가 민방위 교육을 갔을 때다. 교육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내리고 민방위 교육장으로 빠른걸음으로 갔다. 빨리 민방위 교육장으로 간 다음 자리에 앉아서 책을 계속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교육장에서 도착해서 자리에 앉은 다음 난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교육이 끝나고 역시 빠른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갔다. 마찬가지로 빨리 앉아서 책을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그렇게 시간이 될 때마다 책을 읽었다. 생각해보니 어린시절 내가 이렇게 책을 열광하며 읽었던 적이 한 번 있었다. 드래곤볼이 나왔을 때.
전지적 1인칭 관찰자 시점(?)이 주는 묘한 매력
이 책은 조카가 삼촌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인데 이상하게 전지적 작가 시점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조카가 삼촌의 삶을 관찰하는 입장이지만 조카는 삼촌의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즉, 조카가 전지적 작가로서의 역할도 하는 것이다. 사실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천명관 작가는 그런 것에 얽매이는 스타일은 아닌 듯 하다. 그래서 뭔가 이상하기는 하지만 읽다보면 이 또한 자연스러워지게 되고 몰입도는 묘하게 증가한다.
유머센스가 있는 문장
책에서 가끔씩 엄청 긴 문장이 나오곤 하는데 그런 문장들은 대부분 천명관 작가의 유머가 많이 들어간 문장들이다. 예를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천명관 작가의 유머 스타일은 나에게 잘 맞는 듯 하다.
당시 삼촌이 타고 간 배는 여객선이 아니라 작은 밀항선이었다. 그런데 승선을 해보니 오디션을 보러 가는 사람은 삼촌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어떤 경로로 그 배에 오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치 영화사에서 따로 전세를 낸 듯 배 안엔 홍콩의 꿈을 안고 무작정 몸을 실은 젊은 이소룡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삐쩍 마른 이소룡, 뚱뚱한 이소룡, 머리가 너무 큰 이소룡, 다리가 조금 짧은 이소룡, 빨간 이소룡, 파란 이소룡, 찢어진 이소룡, 이소룡과 매우 비슷하기는 하지만 어딘가 살짝 삑사리가 난 이소룡, 아무리 잘 봐주려고 노력해도 이소룡과 비슷한 데라곤 한 군데도 없는 이소룡, 도대체 얘는 또 뭐지, 싶은 이소룡, 이보게 젊은이, 인생은 분명 용기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지혜도 필요한 법이라네, 라고 말해 주고 싶은 이소룡, 그런데도 말귀를 못 알아듣고, 그게 무슨 뜻인데요, 라고 물으면,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말이지, 음…..그럼 이렇게 얘기해 볼까? 옛날 이탈리아에 프란체스코란 성인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께선 다음과 기도문을 남기셨다네. 주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게 하시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그런데도 여전히 아이, 씨발,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요, 라고 하면 가지 말라고! 인마! 가봤자 안 된다고! 라고 말해 주고 싶은 이소룡…….
가끔씩 나타나는 통찰력 있는 문장, 그리고 한국적인 특성
책을 읽다보면 작가의 통찰력있는 문장들이 툭툭 튀어나오는데 그 문장들은 한국적인 특성이 있다.
- 내가 살아보니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외로움이더라. 그건 암이나 전쟁보다도 더 끔찍한 거야. 젊었을 땐 나도 그걸 몰랐어. 그래서 사람들한테 못되게 굴었지.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같이 어울려서 지지고 볶고 할 때가 행복했는데…….
- 그래. 자넨 마치 세상이 무슨 무협지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했어. 세상엔 숨은 고수들이 있고 언젠가 그런 고수가 나타나 자네에게 무술을 전수해 줄 거라고 말이야. 그래서 나를 자네의 상상 속에 억지로 끼워 넣은 거지.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 법이거든. 사실 난 그냥 밖에 나가 달밤에 체조를 하고 있었을 뿐인데 그게 자네 눈엔 엄청난 고수처럼 비쳤던 모양이지. 그래서 나한테 무술을 가르쳐달라고 한 거고. 그런 면에선 자네도 죄를 지은 거야.
- 그 쓸쓸함은 어쩌면 고향을 등진 모든 이들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시대는 모두 고향을 떠나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실향의 운명을 짊어진 시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허기진 마음으로 무리를 찾아 헤매지만 끝내 아무 데도 정착을 못하고 타자로서 영원히 변두리를 떠돌 수밖에 없는 그 실향의 운명은 변호사 나리라고 해서 별반 다른 게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는 소설을 왜 읽는가?
천명관 소설집 : 고래, 고령화가족, 북경반점, 총잡이 등
‘나의 삼촌 브루스 리’을 읽고 ‘고래’도 읽었는데 개인적으론 ‘나의 삼촌 브루스 리’가 더 공감되고 좋았다. 참고로 ‘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웹소설로 연재가 되던 작품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천명관 작가의 소설을 바라보는 시각과 통찰력이 너무 좋았다. 책 마지막에 있는 ‘작가의 말’에 보면 이런 문장이 있다.
- 나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왜 소설을 읽는 걸까요? 나는 소설이 기본적으로 실패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며 부서진 꿈과 좌절된 욕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 잡았다 놓친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파탄 난 관계,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운명에 굴복하는 이야기,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고,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이야기, 암과 치질, 설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소설은 결국 실패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실패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이들, 아직도 부자가 될 희망에 들떠 있는 이들은 소설을 읽지 않습니다.
- 자신의 불행이 단지 부당하고 외롭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래서 자신의 불행에 대해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이 문장을 읽고 나 또한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나는 주로 언제 소설책을 읽었던가? 그리고 왜 읽었던가?” 생각해보면 나에게도 소설은 항상 치유였다. 소설속 주인공이 힘든 위기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통해 나 또한 내가 현재 처한 어렵고 힘든 상황이 극복 되기를 바라는 희망이자 치유였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평소 더글라스 캐네디의 소설도 좋아하는 듯 하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통해 현실의 상처를 치유했으면 좋겠다. 만약 어떤 소설을 읽어야 할지 모른다면 천명관 작가의 책부터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조심스런 제안을 해본다.